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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ERSIVE · 이머시브 콘텐츠

이머시브 기획자의 언어 ① — 공간과 몰입

기획자는 기술과 창작 사이의 통역사다. 용어를 모르면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조차 그릴 수 없다.

STUDIO REALIVE 에디토리얼 · 2026.06.28


회의실 풍경 하나를 떠올려 본다. 기획자가 "관객이 그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엔지니어가 되묻는다. "6DoF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럼 예산이 두 배입니다." 기획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회의는 그렇게 어긋난 채로 흘러간다.

이머시브 콘텐츠의 현장은 창작자, 기술자, 디자이너, 사운드 엔지니어가 한 테이블에 앉는 자리다. 그리고 기획자는 그 사이에 앉은 통역사다. 통역사가 단어를 모르면 양쪽 모두 답답해진다. 멋진 아이디어가 기술의 한계에 부딪혀 좌초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안 될 것 같아서'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용어를 아는 일은 지식 자랑이 아니라,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그리는 일이다.

이 글은 그 어휘 중에서도 '공간과 몰입'의 축을 다룬다. 관객을 어디에 세우고, 어떻게 그 안에 머물게 할 것인가에 관한 말들이다. (가상 캐릭터와 실시간 제작의 어휘는 다음 편의 몫으로 남겨 둔다.)

XR이라는 우산, 그 아래의 세 글자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알파벳 약어들이다. 회의에서 가장 자주 섞여 쓰이고, 가장 자주 오해를 부른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 원칙적으로 현실 시야를 차단하고 가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헤드셋을 쓰면 눈앞의 방은 사라지고 다른 세계만 남는다(다만 요즘 헤드셋은 바깥을 카메라로 비춰 주는 '패스스루' 기능을 갖춰, '완전 차단'이라는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 현실 위에 디지털 정보를 덧입힌다. 카메라로 비춘 무대 위에 가상 캐릭터가 올라서는 식이다. 현실이 바탕이고, 그 위에 한 겹을 더한다. MR(Mixed Reality, 혼합현실) — 가상의 물체가 현실의 책상에 '놓이고', 사용자가 그것을 만지거나 돌릴 수 있다. AR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가상과 현실이 서로 반응한다. 다만 AR과 MR의 경계는 업계에서도 합의된 정의가 없어, 같은 콘텐츠를 누구는 AR로 누구는 MR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셋을 한데 묶는 우산이 XR(eXtended Reality, 확장현실)이다. X는 V·A·M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변수다. 그러니 누군가 "XR 콘텐츠"라고 말하면, 그것은 아직 무엇 하나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기획서에 'XR'이라고만 적는 것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어딘가 멀리'라고 쓰는 것과 같다. 통역사의 첫 일은, 그 우산 아래 정확히 어느 글자를 가리키는지 묻는 것이다.

기획자가 이 구분을 쥐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약어 하나가 바뀌면 필요한 장비, 제작 난도, 예산, 관객의 동선이 통째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3DoF와 6DoF — 관객은 둘러보는가, 걸어 들어가는가

앞의 회의실을 어긋나게 했던 바로 그 용어다. DoF는 Degrees of Freedom, 즉 '자유도'다. 가상 공간 안에서 관객이 몸을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

3DoF(3 자유도) — 관객은 제자리에 선 채 고개만 돌린다. 위아래, 좌우, 기울임. 360도 영상이 대표적이다. 사방을 둘러볼 수는 있지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갈 수는 없다. 6DoF(6 자유도) — 여기에 '이동'이 더해진다. 앞뒤·좌우·위아래로 실제로 걸어 다니며 공간을 점유한다. 가상의 무대 뒤로 돌아가 볼 수도, 가까이 다가가 디테일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차이는 결정적이다. 3DoF가 '둘러보기'라면 6DoF는 '걸어 들어가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제작비, 공간 설계, 트래킹 기술의 거대한 간극이 있다. 기획자가 "관객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같은 말을 무심코 던질 때, 그것이 6DoF를 요구하는 한 문장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 예산 회의는 늘 파국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6DoF가 늘 정답인 것도 아니다.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멀미(사이버 시크니스)를 부르기 쉽고, 관객이 안전하게 움직일 물리 공간과 동선을 따로 설계해야 하며, 트래킹 장비의 비용도 함께 커진다는 뜻이다. 둘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경험이라면, 3DoF가 오히려 더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일 수 있다. 자유도를 높이는 일은 언제나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과 함께 가야 한다.

프레즌스와 몰입 — 같은 말이 아니다

이머시브 콘텐츠를 이야기할 때 가장 헷갈리는 한 쌍이 있다. 몰입과 프레즌스다. 흔히 같은 뜻처럼 쓰이지만, 기획의 관점에서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몰입(Immersion) — 기술과 환경이 관객을 얼마나 둘러싸는가, 그 객관적인 정도다. 화면이 넓을수록, 소리가 사방에서 들릴수록, 시야가 가려질수록 몰입의 강도는 올라간다. 장비와 설계가 만들어 내는 '바깥쪽'의 조건이다. 프레즌스(Presence) — 그래서 관객이 '내가 진짜 여기 있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각이다. 마음 안쪽에서 일어나는 착각에 가깝다.

이 둘이 갈라지는 지점이 기획의 급소다. 16K 화면에 둘러싸여도(높은 몰입) 정작 '여기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고(낮은 프레즌스), 반대로 단출한 무대에서도 서사와 연출의 힘으로 강렬한 프레즌스가 일어날 수 있다.

몰입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프레즌스는 살 수 없다. 해상도는 예산의 문제이고, 프레즌스는 설계의 문제다.

teamLab의 전시가 초고가 장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 ABBA Voyage의 아바타 공연에서 관객이 실재하지 않는 무대를 향해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획자의 진짜 목표는 몰입의 수치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프레즌스를 일으키는 것이다.

들리는 세계 — 디제시스와 공간음향

몰입의 절반은 사실 귀로 들어온다. 그런데 사운드의 어휘는 영상의 그것보다 더 자주 무시된다.

디제틱 사운드(diegetic sound) — 콘텐츠 세계 '안'에서 나는 소리다. 무대 위 캐릭터가 부르는 노래, 가상 공간의 문이 열리는 소리처럼, 그 세계의 인물도 들을 수 있는 소리. 반대로 논디제틱(non-diegetic)은 세계 바깥의 소리, 배경음악이나 내레이션처럼 관객만 듣는 소리다. 원래 영화 이론의 용어지만, 이머시브에서는 더 결정적이다. 관객이 세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어떤 소리를 디제시스 안쪽에 둘 것인가가 곧 프레즌스를 좌우한다.

공간음향(spatial audio) — 소리에 위치와 거리를 부여하는 기술이다.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는 뒤에서, 위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는 위에서 들리게 한다. 그 정교한 구현 방식 중 하나가 앰비소닉(Ambisonics)으로, 한 점을 둘러싼 모든 방향의 음장(音場)을 통째로 기록·재생한다. 관객이 고개를 돌리면 소리의 방향도 함께 따라 도는 것이 그래서 가능하다.

기획자가 이 말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사운드가 '나중에 입히는 장식'이 아니라 공간 설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6DoF 공간에서 관객이 어디로 걸어갈지 모를 때, 소리는 가장 강력한 길잡이가 된다.

공간을 점유하고, 관객이 개입한다

마지막으로, 화면 바깥으로 나오는 두 어휘다.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 — 평평한 스크린이 아니라 건물 벽, 무대 구조물, 사물의 굴곡진 표면에 정확히 맞춰 영상을 투사하는 기술이다. 입체가 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화면이라는 사각형의 감옥에서 영상을 풀어내, 공간 자체를 캔버스로 쓰는 일이다. 미디어아트가 전시장 전체를 점유하는 방식이 대개 이것이다.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 반응성) — 관객의 시선·동작·선택에 콘텐츠가 응답하는 성질이다. 손을 대면 꽃이 피고, 가까이 다가가면 음악이 바뀐다. 이 한 겹이 더해질 때, 관객은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건너간다. 같은 콘텐츠라도 누가 어떻게 움직였느냐에 따라 다른 경험이 되고, 바로 그 차이가 프레즌스를 끌어올린다.

이 두 어휘가 만나는 곳에서 '미디어아트적 공간 점유'가 완성된다. 영상은 벽을 떠나 공간을 채우고, 그 공간은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관객은 더 이상 작품 앞에 서 있지 않고, 작품 안에 들어와 있다.

용어는 지도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여기 늘어놓은 어휘를 '아는 말'에서 '협업의 테이블에서 쓰는 말'로 옮겨 가는 자리가 있다. SM UNIVERSE·STUDIO REALIVE·SMHRD 컨소시엄이 운영하는 K-POP 이머시브 콘텐츠 기획자 양성과정은 XR의 구분에서 시작해 6DoF 공간 설계, 그리고 프레즌스를 일으키는 연출과 공간음향까지, 기술과 창작 사이를 통역하는 언어를 실제 산출물로 빚어 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더 궁금하다면 모집 페이지를 살펴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환기하며 글을 닫는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용어들은 어디까지나 도구다. 6DoF를 안다고 좋은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앰비소닉을 입혔다고 관객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용어는 협업의 테이블에서 서로의 말을 알아듣게 해 주는 지도일 뿐, 그 지도가 데려다줄 목적지 — '관객이 진짜 여기 있다고 느끼는 순간' — 는 여전히 기획자의 상상력이 정하는 것이다.


좋은 통역사는 단어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두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공간과 몰입의 어휘를 손에 쥔 기획자가 다음으로 건너갈 곳은, 가상의 존재와 실시간의 제작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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